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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지인이 뽑은 새 차 K5를 타고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초지진-덕진진-강화평화전망대-동막해수욕장의 코스 였는데 첫 방문지였던 초지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이렇게 포스팅으로나마 알려봅니다.

초지진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운요호)사건의 격전지로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있었던 것을 복원한 사적 제 225호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설명을 참고해주세요.

초지진(강화8경, 국방유적, 문화재/국가/사적, 길상면)

사적 제225호로 강화의 동남단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김포시 대명리와 마주 보이는 곳이다. 1656년 진이 설치되고 1679년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이 축조되어 이 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가 있다. 고종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 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이다.

진장으로 1666년에는 병마만호가 있다가 1763년에는 첨사가 있었고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에 배 3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인·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근대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덕진, 광성의 제진을 공략하였다.

1875년 8월 21일 일본군함 운양호가 초지진포대와 격렬한 포격전을 벌여 싸운 병자수호조규의 시효진이다.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 있다. 1973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당시의 격전지인 길상면 초지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아 사학자는 물론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초지진을 보는 목적 중의 하나가 당시 격전지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포탄자국 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문제의 포탄자국. 직접보니 꼭 이래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초지진 관광안내소 쪽에서 보면 포탄흔적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쉽게 포탄흔적을 찾을 수 있지요. 아주 쉽게요.


계단을 올라가서 본 포탄의 흔적입니다. 코 앞까지는 들어가지 못해서 한걸음 뒤에서 봤는데, 참으로 눈에 잘 들어옵니다. 하얗게 띠를 둘러놓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진을 좀 더 크롭해서 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포탄흔적이라고 눈에 딱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표시를 해 놓지 않았더라면 제 눈썰미로는 구분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사적으로까지 지정되어있는 역사의 산물에 스프레이(?)를 뿌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바로 앞에있는 노송에도 포탄흔적이 있다고 했는데 저는 고개를 쳐들고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방문했던 날이 진눈깨비가 휘날렸던 날이라 나무에서 물이 계속 떨어져서 고개들고 찾기 힘들기도 했지만.

이런 생각은 강화도 여행을 가기 얼마전 이웃블로거 안다님의 (불암산 #1) 지나친 안전설비는 산행의 독~![링크] 라는 포스팅을 읽으면서 각성이 된 탓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다님은 해당 포스트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산 바위에 수많은 철 지지대를 박아 넣어 인위적으로 만든 등산로를 보고 마음아파 하셨습니다. 장소불문 많은 여행지를 다니신 안다님이 이 광경을 봤다면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머릿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던 초지진의 모습. 아마 이렇게 포스팅 해 달라는 누군가들(누굴까요 ^^)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강화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 http://tour.ganghwa.inche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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